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시작되는 왜구의 공세 == >전라도 안렴사(按廉使) 유량(柳亮)이 보고하길, 왜적이 배 80여 척을 진포(鎭浦)에 정박시킨 후,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고 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우왕 14년 5월 [[http://db.history.go.kr/KOREA/document.do?recordId=kr_137_0010_0050_0030|#]]}}} ---- >왜구가 세 도(道)를 침략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州)·군(郡)의 사람들을 죽이고 불태워도 장수와 수령 가운데 막아낼 자가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정지전>}}}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i63.tinypic.com/333ftw4.jpg|width=100%]]}}} || || {{{#000000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피해 상황''' }}} || 고려의 군사력이 서경에 집중되고 북방으로 진군하는 사이, 이성계가 제기했던 문제 중 하나였던 [[왜구]]의 출몰은 현실이 되었다. 우왕 시기 수도 개경을 수차례 위협하고 수천, 수만의 군대로 고려 전역을 초토화시키던 왜구의 대공세는 [[진포해전]] 및 [[황산대첩]]의 대승리와 [[고려 말 왜구의 침입#s-6.3|관음포해전]]에서 [[정지(고려)|정지]](鄭地)가 거둔 승리로 점점 약해지고 있었으나, 명나라 동남 해안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그 세력은 건재했다.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침략이 덜했던 것은 고려군에게 왜구가 대패하면서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므로, 고려 군대의 공백은 다시 왜구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우왕 또한 뻔히 예상되는 '북쪽으로 신경을 쏟는 사이 벌어질 왜구의 침공' 을 모르지는 않았다. 우왕은 주력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하는 와중에도 왜구에 대한 대비책을 꽤 세워놓은 편이었다. 경기도의 군사를 추려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서 왜구를 막게 하는 한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광보(李光甫)로 하여금 왜구에 대비토록 했다. 또한 요동 정벌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노예건 뭐건 모조리 징발하여 왜구와의 싸움을 막기 위해 내보냈다. 당시 우왕은 왜구에 대해 지속적으로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요동원정 이후에 초래될 군사적 공백을 막으려고 한다고 해도, 요동 원정군에 전력이 투입되는 한 왜구의 준동을 막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우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온 왜구는 고려 각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1388년 4월 21일, 왜구는 초도(椒島)[* 지금의 황해남도 과일군 초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수도 개경의 군사력은 공백 상태였고, 국왕마저 서경에 있었기에 봉화가 계속해서 울리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어 5월 13일에는 80척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왜구가 진포에 상륙하여 주변 지역을 초토화했다. 이에 우왕은 왜구를 막기 위하여 다섯 명의 원수[* 이 중에는 조준도 있었다.]를 파견하는 한편, 전라도와 양광도에서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징발하여 왜구를 막으려 했으나 왜구는 양광도의 40여개 군을 무인지대를 밞듯 활보했다.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전리(田理)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적을 막으려고 하지만 병력이 취약해 방법이 없다."'''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이성계나 최영 외에 왜구 내에서 명성이 혁혁한 고려 장수는 관음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정지였는데, 그 정지조차 요동 공격에 동원되었기에 왜구를 막을 장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왕은 분명히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2차 요동원정이 지속되는 한 이는 모두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이상훈.] 이런 왜구들은 위화도 회군 이후, 정지와 이희가 전장에 투입된 이후에야 소탕되었다. 그리고 우왕이 왜구에게 골머리를 썩고 있는 사이, 북쪽에서는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